1949년 텔아비브 출생, 이스라엘 최연소 총리 당선
중동전쟁 격랑 속 '최악의 총리' 평가 지배적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4일(현지시각) 예루살렘 인근에서 열린 시오니즘 지도자 제브 자보틴스키의 추모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4일(현지시각) 예루살렘 인근에서 열린 시오니즘 지도자 제브 자보틴스키의 추모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월요신문=이종주 기자]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한 국내외적 관심이 뜨겁다. 그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린 것은 지난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때문이었지만, 전쟁 전부터도 그는 온갖 비리와 민주주의 후퇴 등에 따른 부정적 평가를 달고 있었던 인물이다. 이번 하마스 수장 암살 이후로 전쟁의 격랑이 전 세계에 휘몰아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네타냐후 총리는 어떤 인물인지, 그가 '역대 최악의 총리'라는 별명을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봤다. 

1949년 텔아비브 출생…MIT 건축학 전공, 최연소 총리 당선

베냐민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인 1949년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벤지온 네타냐후로, 대학 교수를 지냈다. 네타냐후는 부친을 따라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후 6년간 군복무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1980년대 후반 이스라엘 정계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거의 미국에서 활동했다.

MIT 에서 건축학을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부를 마쳤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재학 중에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도 수학했으나 형 요나탄 네타냐후가 엔테베 작전 중 사망함으로 인해 정치학 박사과정을 마치지 못했다.

MIT 졸업 후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에서 근무했다. 이때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버락 오바마에 대항할 밋 롬니를 BCG 동료로 만나 친분을 쌓았다.

1982년에는 워싱턴의 주미 대사관에서 근무하였고,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주 UN 대사를 지냈다. 1988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츠하크 샤미르 정권에서 각료로 재직했다.

이후 1993년 리쿠드 당수로 선출됐으며, 1996년 총선을 맞이했다. 이 총선에서는 동시에 총리를 별도로 직선으로 뽑도록 돼있었는데, 총선 직전 팔레스타인의 소행으로 보이는 테러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초강경 정책을 실시할 것을 내비치며, 온건파인 시몬 페레스 당시 총리를 공격했다. 결국 그는 페레스를 1% 포인트 차로 제치고 총리로 당선됐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였고, 또한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태어난 최초의 총리였다.

네타냐후는 총리로 재직하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야세르 아라파트와 대립하기도 했으나, 미국과 요르단의 중재로 와이리버 협정을 체결해 영토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 체결은 그를 지지하던 우파의 신임을 잃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개인적인 문제와 부패 스캔들 등으로 구설수에 올라 1999년 총리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에게 지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에 그는 리쿠드의 당수직도 내놓고 잠시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후 이스라엘 정국은 경제위기, 집권당인 카디마의 부패 스캔들, 가자 지구 문제 등으로 혼란이 계속됐다. 비리에 연루된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이후 새 정부 구성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2009년 2월, 조기 총선이 실시됐다.

가자 사태가 쟁점이 된 총선 기간 중에서도 강경 우파 행보를 이어갔으며, 이에 호응하는 유권자들의 반응에 카디마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도 작용해 그와 리쿠드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총선 결과 그가 이끄는 리쿠드는 카디마에 1석 차로 패했으나, 그는 에후드 바라크 전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등과 연정을 구성해 3월 31일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후 5선 연임을 했다.

2021년 해산으로 치뤄진 총선에서 연정 구성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마스가 동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조치에 반발해 무력으로 대응하자 하마스에 보복공격을 해 반격 작전을 주도했다.

교전이 끝난 후 나프탈리 베네트가 야이르 라피드와 연정 협상을 한다고 밝혀 정권을 잃을 위기에 몰렸고, 결국 실각했다. 이후 2022년 12월 29일 다시 정권을 잡았지만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자 위기를 맞았다.

비리·민주주의 후퇴·전쟁범죄…'역대 최악의 총리' 평가도

세계의 자유 지수만 봐도 2차 집권 전인 2007~2009년 기준 이스라엘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정치적 권리(PR) 37점, 시민 자유(CL) 47점, 총 84점이었으며, 2003~2014년까지 이스라엘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81~84점 언저리로 꽤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네타냐후 집권 이후 점수가 급격히 감소해 2024년 현재 이스라엘의 세계의 자유 지수는 PR 34점, CL 40점, 총 74점이다. 15년 만에 10점이 준 셈이며, 대한민국과 큰 차이가 없는 나라에서 선진국 중에서는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가장 자유롭지 못한 국가로 전락한 셈이다.

또한 1차 집권 때에도 부패 혐의에 휘말린 적이 있으며, 2016년 6월에는 사기 혐의로 파리에서 기소된 프랑스 사업가 아르노 맹랑에게서 17만 유로의 자금을 받았다고 본인 스스로 시인하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뇌물수수 물의를 일으켰다.

그는 팔레스타인과의 적대적 공생을 조장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자국 군인의 전쟁 범죄를 묵인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5차 중동전쟁'이 눈앞에 다가온 만큼 그의 행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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