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 무슬림 빈 라덴, 2년 준비 후 결행
사망자 3000여 명, 최대 7만 명 넘는 피해 발생

비행기 충돌 후 국제무역센터. 사진=위키피디아
비행기 충돌 후 국제무역센터. 사진=위키피디아

[월요신문=이승주 기자]지금으로부터 23년 전 세계 최강국을 자부하던 미국에서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공격받지 않았던 미국 본토가 테러범들에 의해 불바다로 변한 '9·11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테러에 의한 사망자 수만 3000여 명에 이른다. 냉전 종식 후 점차 국제 문제에서 발을 빼던 미국은 이 사건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란 새로운 전쟁을 시작했다.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 조직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미국 내 운항 중이던 비행기 4대를 공중 납치해 현지 주요 건물과 충돌시키는 충격적인 테러를 자행했다.

테러범들이 세운 목표물은 각각 미국 경제와 국방, 정치를 상징하는 뉴욕 맨해튼 세계무역센터, 워싱턴 D.C. 국방부 청사(펜타곤), 백악관 또는 국회의사당이었다. 이중 백악관 또는 국회의사당 충돌 계획은 납치 단계에서 실패했고, 나머지 두 곳에선 계획됐던 테러 행위가 실제로 벌어졌다.

당시 테러로 총 2996명(세계무역센터 2606명, 펜타곤 125명, 비행기 탑승자 246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 수는 6000여 명에 달한다. 사고 현장 분진 등에 의한 암 발생까지 포함할 경우 최대 피해자 수는 7만 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도 전해진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아닌 테러에 의한 인명피해로는 역대 최대에 해당하는 사건이 다른 곳도 아닌 미국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미국은 이후 테러를 전쟁에 준하는 안보 위협으로 상정했고 이윽고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2021)과 이라크 전쟁(2003~2011)을 시작했다. 또한 미국 내에서 애국자법이 제정됐으며, 아랍계 소수민족에 대한 증오범죄가 줄을 잇기도 했다.

테러의 배경

9·11 테러 발생의 배경을 알기 위해선 1979년 발발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부터 살펴봐야 한다. 당시 소련의 침공을 받은 아프가니스탄과 그 주변국 파키스탄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무슬림을 돕기 위해 전 세계 무슬림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를 지하드(성전)에 나서는 무자헤딘(전사)이라 불렀다.

소련과 체제 경쟁 중이던 미국은 무자헤딘을 후방 지원했고 무자헤딘의 지도자 중 한 명이 사우디아라비아 명문가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이었다.

미국과 빈 라덴을 비롯한 무자헤딘의 관계는 1989년 소련과 전쟁이 끝난 후 반전됐다. 빈 라덴과 그를 따르는 극단주의 성향 무슬림들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표방했고 그렇게 '알카에다'와 탈레반 등이 창설됐다.

빈 라덴의 경우 이때부터 미국과 이스라엘 및 사우디아라비아 등 서방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온 아랍 지역 내 세속주의 정권에 대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인이라면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은 테러 행위로 표출됐는데 9·11 이전 발생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98년 케냐 미 대사관 폭탄 테러 및 탄자니아 미 대사관 테러 등이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빈 라덴은 미국의 대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 등을 성토하며 전 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해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이 같은 극단적인 주장에 동조한 전 세계 각지의 반미 성향 무슬림들이 그의 밑으로 몰려들며 알카에다의 규모 역시 확대됐다.

9.11 테러를 지시한 오사마 빈 라덴. 사진=위키피디아

테러 준비 들어간 빈 라덴

빈 라덴은 일찍이 미국 본토에 대한 테러를 구상했고 처음부터 미국 군사력에 근간이 되는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테러 준비는 1999년 시작됐다. 그해 빈 라덴과 그의 측근들은 비행기를 이용한 테러를 계획하며, 교육 수준이 높고 서방 유학 또는 거주 경험이 있으며 영어에 능통한 자들로 비행기 납치조 20여 명을 모집했다. 그렇게 모인 납치조 인원들은 알카에다와 관계가 좋던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듬해인 2000년 빈 라덴은 본인의 사우디 인맥을 동원해 납치조들의 새 여권을 만들어 줬고 이후 납치조 인원들은 차례로 미국에 들어가 현지에서 추가적인 비행교육을 이수했다. 그리고 2001년 7월경 9·11 테러에 대한 최종 계획을 빈 라덴이 승인했다.

한편, 당시 미국에선 CIA가 알카에다 조직원의 미국 입성을 확인했고 FBI에서 비행교육 이상징후 등을 포착했으나, 기관 간 정보 협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등의 문제로 테러에 대한 선제적 대비는 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4번의 하이재킹, 충돌까지 단 1시간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부터 9시경 사이 아메리카 항공 11편(AA11), 유나이티드항공 175편(UA175), 아메리칸항공 77편(AA77), 유나이티드 항공93편(UA93) 등 4편의 비행기가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됐다.

모하메드 아타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은 이날 오전 8시 13분경 AA11편을 납치해 오전 8시 46분경 비행기를 뉴욕 맨해튼에 있던 제1세계무역센터와 충돌시켰다.

마르완 알 셰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는 오전 8시 43분경 UA175편을 납치해 오전 9시 3분경 이미 무너지고 있던 제1세계무역센터 옆 건물 제2세계무역센터와 비행기를 충돌시켰다.

하니 하뇨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는 오전 8시 51분경 AA77편을 납치해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 펜타곤 건물과 충돌시켰다.

지아드 자라를 비롯한 4명의 테러리스트들은 오전 9시 28분경 UA93편을 납치해 워싱턴으로 날아갔는데, 테러 정황을 포착한 승객들의 반발로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10시 3분경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한 광산으로 추락했다.

첫 충돌 직후인 8시 49분경 미국 현지 언론은 사고 소식을 긴급 보도했고 이내 TV 생중계를 통해 두 번째와 3번째 비행기 충돌 화면이 전 세계로 송출됐다.

또한 당시 TV 화면을 보던 많은 사람들은 첫 번째 충돌 직후 이를 테러로 보기보단 누군가의 실수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는데, 연속해 충돌이 발생하자 이 사건이 테러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됐다.

테러 소식을 전해 들은 조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사진=위키피디아
테러 소식을 전해 들은 조시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사진=위키피디아

패닉에 빠진 미국과 달라진 세계 정세

9·11 테러 직전까지 대다수 미국인은 자국 영토가 공격받을 것이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소련이란 적대국이 사라진 후 미국을 위협할 나라는 없다고 여긴 것인데, 9·11 테러는 이 같은 미국인들의 믿음을 산산이 부숴 버렸다.

오히려 알카에다가 배후란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비행기 테러까지 일어나는 마당에 폭탄 테러는 쉬운 거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추가적인 연쇄 폭탄 테러에 대한 공포가 미국 사회를 휩쓸기도 했다.

9·11 테러는 미국의 대외 정책도 완전히 뒤집어 놨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은 외부 위협 감소 및 재정 등의 이유로 점차 대외 문제 개입을 줄여가고 있었는데, 테러가 발생하자 이후 적극적인 대외 개입으로 외교 입장을 변경했다. 이에 미국은 10년이 걸린 이라크 전쟁과 20년 넘게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하게 됐다.

아울러 전 세계인들은 이 사건 이후 벌어진 이라크 후세인 정권 몰락과 빈 라덴 사살 등을 통해 미국이란 나라의 보복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목도했다.

한편 9·11 테러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사건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피해자 주변뿐 아니라 그날 현장을 지켜봤던 많은 이들이 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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